"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아주 특별한 국가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이와 똑같은 소명이 신약 성경에서는 교회에 적용되고 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거룩한 나라 (벧전2:9) 처럼 행동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 리처드 마우 "무례한 기독교" 76 페이지.
My Love... My Hope... and My Faith...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아주 특별한 국가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이와 똑같은 소명이 신약 성경에서는 교회에 적용되고 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거룩한 나라 (벧전2:9) 처럼 행동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 리처드 마우 "무례한 기독교" 76 페이지.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이름과 함께 현재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이야기 한다.
일이 나의 정체성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점차 인공지능이 더 많은 일을 하고, 결국엔 "노동의 종말"을 경험하게 될텐데,
이는 단순한 일자리의 감소, 혹은 노동의 필요의 감소를 넘어서
우리의 정체성을 더이상 일로써 정의할 수 없는 시대를 의미한다.
생존을 위한 노동이 불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정의해야하는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사실, 노동은 원래 먹고살기위한 것이 아니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장 26절)
노동은 죄의 결과가 아니고 태초에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소명이다.
즉, 이 소명은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이고,
그렇게 이웃을 섬기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생존을 위한 노동의 필요가 줄어드는 때에,
우리는 노동의 본질을 생존경쟁이 아니라 돌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성, 인간의 본질,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지는 계속 변천해왔습니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면, ....
인간 자신이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자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 천현득 (2025년 가을 "철학과현실" 특별좌담 에서)
인공지능시대에 인간다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 인데,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고 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피부색 혹은 성별에 따른 차별이 있었고,
이런 차별이 곧 그 시대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을 드러내는데,
이런 차별은 시대에 따라 점점 변해왔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 인간다운 것인지' 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다움에 대한 탁월한 이해라고 생각되지만... 이러한 실존주의적인 견해는 쫌 그렇다...
인간답기위해 끊이없이 질문해야한다는 압박감도 그렇고...
목적없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불안함도 그렇다...
사실, 니체가 죽이려던 신은 죽지 않았고, 인생의 부조리가 인간의 본질도 아니다.
인간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우리가 사랑받고 사랑하는 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일 거다.
인공지능시대에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하면서도,
이웃 사랑하기에 더욱 힘쓰는 사람이 되길...
그렇게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앞에서 나와 우리를 알아가는 지혜로운자 되기를...
인공지능 시대는 그리스도의 시대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과 기능을 빠르게 대체해가는 오늘,
우리는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경쟁의 기준이 바뀌는 경험하고 있다.
과거에는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했다면,
이제 이러한 기능적 능력들은 점점 기계에게 위임되고 있으며,
인간은 더 이상 기능 중심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는 새로운 기준을 요구한다.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중요한 질문이 된다.
기능이 아니라 관계가 중심이 되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계적 존재이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발견한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가 오래전부터 강조해온 핵심 가치와 맞닿아 있다.
기독교는 인간의 가치를 능력이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공지능 시대의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가치로 부각된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오히려 더 인간다워질 것을 요구받는다.
경쟁과 효율이 아니라, 공감과 배려, 사랑과 관계가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공지능 시대는 단순한 기술 혁신의 시대를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다시 묻고 회복하는 시대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새롭게 조명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복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다는 말씀을
나이가 들 수록 새삼 묵상하게 되는데,
새로울 것 없는 단순한 삶이지만 하루하루 의미있는 시간들이 복되다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단조로워보이는 시냇가 나무처럼 복되게 살고 싶은데,
나붓기는 바람에도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이게 무슨 복이 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삶이 미풍에도 흔들리는 수준임을 확인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주님, 믿음을 주소서... 그렇게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 내게 세상의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과학의 발전은 흔히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지만,
그 실제 모습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개별적인 과학적 성과나 발견은 실험과 검증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려 노력한다.
이 점에서 과학적 진보 자체는 분명 객관적인 기준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연구가 선택되고, 어떤 기술이 발전하며, 어떤 방향으로 자원이 집중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객관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과학의 발전 방향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맥락 속에서 결정된다.
때로는 다수의 합의와 공공의 필요에 의해 민주적으로 결정되기도 하고,
특정 권력이나 소수의 판단에 의해 독단적으로 추진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국가 주도의 대형 연구 프로젝트나 군사 기술 개발은
종종 소수의 의사결정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반면 공공의 건강이나 환경 문제와 관련된 연구는
사회적 요구와 합의를 바탕으로 방향이 설정되기도 한다.
특히 오늘날 인공지능의 발전 양상을 보면, 그 방향성이 강하게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대규모 자본과 인프라를 보유한 빅테크 기업들에 의해 주도되고,
이들은 시장의 수익성과 성장 가능성을 중심으로 연구개발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그 결과, 인공지능은 공공의 필요보다는 광고, 플랫폼 확장, 사용자 데이터 확보 등
기업의 이익과 직결된 분야에서 빠르게 발전하는 경향을 보인다.
결국 과학은 객관성을 지향하지만, 그 발전 방향은 인간 사회의 구조와 가치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객관적 진보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결정 구조와 권력, 그리고 자본의 영향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AI 의 발전은 자본주의 구조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