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창세기는 50장이나 될까? 왜 천지 창조와 아담 이브 이후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까지 창세기에 포함될까?
야곱의 삶이 요셉의 삶이 다 창세기에 포함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건, 창조의 목적을 결국엔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하나님의 집요함... 아닐까? ㅎㅎ
그건, 내 삶 가운데서도 그분이 창세기적인 일을 계속하신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건 대단히 감사한 일입니다...
My Love... My Hope... and My Faith...
왜 창세기는 50장이나 될까? 왜 천지 창조와 아담 이브 이후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까지 창세기에 포함될까?
야곱의 삶이 요셉의 삶이 다 창세기에 포함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건, 창조의 목적을 결국엔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하나님의 집요함... 아닐까? ㅎㅎ
그건, 내 삶 가운데서도 그분이 창세기적인 일을 계속하신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건 대단히 감사한 일입니다...
가령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 138억 년 전의 빅뱅과 이후 우주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주었다면,
모세가 본 것은 대략 이런 장면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빛도 별도 없는 상태에서 우주가 시작되고, 빛이 나타나며, 물질이 형성되고, 별과 은하가 생기고, 태양과 지구가 형성되고, 바다와 대기가 만들어지고, 생명이 나타나고, 식물과 동물이 다양해지고, 마지막에는 인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빅뱅, 원자, 핵융합, DNA, 자연선택, 수십억 년, 은하, 행성 형성 같은 개념이나 어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과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 결과가 이를테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처럼 시작해서 빛 → 하늘과 물 → 땅과 식물 → 해·달·별 → 물고기와 새 → 육상동물 → 인간이라는 거대한 단계적 서술이 되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창세기의 순서가 현대 과학의 우주·생명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부 순서를 문자 그대로 대응시키면 문제가 생깁니다. 따라서 “창세기는 현대 과학을 놀랍도록 정확히 예언했다”기보다는 인간의 인지적·언어적 한계 안에서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출현에 관한 계시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에는 사실 세 층위가 있습니다.
① 실제 사건(reality): 우주의 시작 → 별과 행성의 형성 → 지구 → 생명 → 진화 → 인간.
② 모세가 경험한 계시(revelation): 하나님이 그 전체 혹은 핵심적인 모습을 어떤 형태로 보여줌.
③ 모세의 기록(description): 고대 근동의 언어·개념·세계관을 이용하여 그 경험을 표현함.
현대 과학은 주로 ①을 연구하고, 창세기는 ②와 ③을 통해 그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현대인에게 창조를 설명한다면 “약 138억 년 전 뜨겁고 밀도 높은 초기 우주가 팽창하기 시작했다”고 말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조차 궁극적인 실재 자체의 설명이라기보다 21세기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된 설명일 수 있습니다. 5천 년 후의 물리학자가 보면 우리의 빅뱅 설명 역시 매우 원시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따라서 이 관점에서는 성경의 계시를 인간 언어에 맞추어 전달한다는 ‘accommodation(수용/적응)’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개념을 사용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실제로 빅뱅과 진화 과정을 영상처럼 보여주셨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가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창세기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그렇게 접근하면 빅뱅과 진화는 그 창조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창세기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야기한다는 구도가 가능합니다.
어쩌다 TFT를 맡게됐다...
감사한 것은 다소간에 하나님을 조금 더 의지하게 되었다는 거다...
오늘 회의를 끝나고 떠오르는 말씀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우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하나님이 이렇게 생각해주시고 돌봐주시는가....
TFT 의 결과를 떠나서,
말할 수 없는 은혜아래 있음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산책 중에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는데, 갑작스레 물비린내가 확 올라온다.
근데, 그 냄새가 싫지 않다. 어릴적 살던 동네 냄새다.
그 비린내는 좋지 않지만, 그 냄새와 함께 올라오는 기억이 좋다...
사실, 그 시절이 좋을 것도 없었는데...
춥고, 덥고, 배고프고, 찌질했었는데...
시간이 그렇게 잡내를 누르고 구수하게 익혔나 보다.
지금의 시간들도 지나고나면 또 그렇게 좋게 기억될테니,
너무 괴로워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걸로...
사실 오늘 산책중에 생각하던 구호가 있었는데, "See the invisible"
기존에 없는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능력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하는 중에,
그런 능력이 절실히 필요한 지금의 상황에서 더욱 안타까워하며 생각하던 중이였는데,
조그만 다리밑에서 올라오는 물비린내로 안타까움과 걱정들이 좀 가라앉은 것 같다..
감사한 일이다.
오늘의 Jesus Calling 이 딱히 관련된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묘하게 연결되는 것 같아서...
"Faith is the confirmation of things we do not see
and the conviction of their reality,
perceiving as real fact what is not revealed to the senses."
(from "Jesus Calling" Jul. 18)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아주 특별한 국가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이와 똑같은 소명이 신약 성경에서는 교회에 적용되고 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거룩한 나라 (벧전2:9) 처럼 행동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 리처드 마우 "무례한 기독교" 76 페이지.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이름과 함께 현재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이야기 한다.
일이 나의 정체성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점차 인공지능이 더 많은 일을 하고, 결국엔 "노동의 종말"을 경험하게 될텐데,
이는 단순한 일자리의 감소, 혹은 노동의 필요의 감소를 넘어서
우리의 정체성을 더이상 일로써 정의할 수 없는 시대를 의미한다.
생존을 위한 노동이 불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정의해야하는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사실, 노동은 원래 먹고살기위한 것이 아니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장 26절)
노동은 죄의 결과가 아니고 태초에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소명이다.
즉, 이 소명은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이고,
그렇게 이웃을 섬기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생존을 위한 노동의 필요가 줄어드는 때에,
우리는 노동의 본질을 생존경쟁이 아니라 돌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