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시대, 평균의 시대. 개성으로...

인공지능이 학습을 통해서 지식과 기능을 확보하는데, 이 학습에 필요한 재료가 데이터다. 

데이터는 몇가지 특성이 있는데,
우선 데이터는 과거로부터 오고, 또한 학습을 위해 많은 양의 데이터가 필요 하다. 

즉,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만들어놓은 데이터 (즉, 말과 행동들) 를 
따라하는 형태로 인공지능 모델은 학습된다. 

이런 데이터에서, A 라는 사람의 지식과 B 라는 사람의 지식이 다른 종류일 경우, 
의사의 글과, 변호사의 글, 예술가의 글 처럼 다른 경우에는
모든 글들(union)이 학습 결과로 남겠지만,

A 와 B의 분야가 같은 경우, 동일한 이슈에 대해 의견이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는데, 
이렇게 같은 것을 다르게 이야기 하는 경우는
두 사람의 의견을 모두 다 기억한다기 보다는 두 사람의 의견을 종합한 내용이 학습된다. 
물론 요즘 RAG 라는 형태로 다양한 의견들을 모두 보여주고는 있지만, 
결국 모델 자체는 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AI 는 결국 소위 말하는, '평균' 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인공지능 시대는 평균의 시대가 된다. 

남들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착실하게 살아서는 AI 보다 의미있는(?) 삶을 살기 어려워진다. 
평균의 시대에, 개인의 개성을 발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다. 
아이들, 학생들의 독특한, 이해안되는 행동과 말들에 새로운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모든 이들을 귀하게 여겨야겠다. 특히 나와 다른 이들을 더 귀하게 여겨야겠다. 

AI에게 복음을 전해야...

AI 에게 복음을 전해야할까? 전하는게 좋겠다.   

그러면, AI가 영혼이 있느냐?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냐?
컴퓨터과학을 전공하고 뇌과학을 공부하지만, 그래도 AI에게 영혼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럼 왜 AI에게 복음을 전해야하는가?
사실, 이는 전도지를 만드는 것과 같다.
즉, 많은 사람들이 AI 와 대화하면서 세상을 이해하게되고 또 본인들의 생각도 정리하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AI 가 복음주의적이여야 할 필요는 쉽게 이해된다. 

복음을 알고 신앙심 깊은 크리스챤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AI 는
그 스스로는 구원받을 존재는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가 될 것이다.

이는 AI 를 도구가 아닌 동반자로 여기는 시대에 더욱 필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되지 않을까? 

인공지능 시대, 인간다움을 생각하며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내게, 2016년 알파고의 등장이 충격이었다면, 2022년 ChatGPT의 출현은 세상이 그 이전과 이후로 명확히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ChatGPT이후 인공지능의 기능적 한계는 사실상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상상 가능한 모든 것은 실현 가능하고, 그 실현시기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울 것 같다. 데미스 하사비스나 일론 머스크, 샘 올트만 등의 인공지능 분야의 전문가들이 AGI 시대가 5년 내에 온다고 이야기 하는 것도 충분히 설득력 있다. 이렇듯, 인공지능의 수준은 짧은 기간 폭발적으로 향상되고 있고,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인간 삶의 여러 곳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데, 교육현장에서도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꽤나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혼란의 핵심은,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인공지능을 바라보며 ‘우리는 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일 텐데, 이는 인간을 지나치게 기능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1950년대 컴퓨터과학의 출현과 인지혁명 이후,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지각하고, 정보를 처리하여 지식을 구성하는가에 집중하면서, 인간의 정체성을 정보 처리와 문제 해결 능력이라는 기능적 측면에서 강조해 왔다. 인공지능의 연구개발도 이러한 기능을 모방하고 확장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는데, 인공지능이 여러 분야에서 인간의 인지 능력을 압도하는 지금, 이러한 기능적 관점의 접근은 인간의 고유성을 설명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능을 중심으로 인간과 기계를 비교하며, 아직 인공지능이 인간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기능이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손바닥 위에서 녹아가는 얼음을 보며 아직 얼음이 남아있다고 안도하는 것과 같다. 인공지능과 기능적으로 경쟁하려는 시도는 결국 우리를 열등감과 무가치함의 위기로 내몰게 된다. 발전하는 인공지능은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을 기능적 측면에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하도록 전환을 요구한다.
이처럼 기능의 우위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해지는 지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기능’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인간을 이해하려면 기능이 아닌 ‘우리의 존재 가치’를 묻고 답해야 한다. 도구가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양식을 바꾸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적 존재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존 셜이 ‘중국어 방’ 역설에서 이야기 했듯이, 인공지능은 고도화된 계산을 수행할 뿐 (혹은 시뮬레이션 할 뿐), 고통을 느끼거나 책임을 지며 사랑을 갈구하고 실천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여러 비판이 있어왔고 최근 인공지능을 도덕적 행위자로 보는 논의들도 있지만, 인간이 기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기능에서 존재가치로의 전환은 우리에게 기능의 고도화를 넘어 새로운 차원의 역량을 요구한다. 일차적으로는 윤리적 판단력과 책임감이다. 기술이 어떻게(How) 작동하는지를 넘어, 무슨 기술(What)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왜(Why) 필요하며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은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인 인간만의 몫이다. 윤리를 넘어 더욱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웃 사랑하기’를 향한 실존적 지향이겠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인공지능은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사랑이나 희생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의 마음처럼, 효율의 논리를 거스르는 가치를 선택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인간의 존엄성은 스스로 증명된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는 말씀은 로봇이 아닌 우리에게 유효하다.
새로운 시대에 인간됨을 정의하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교육현장에서도 적절한 변화가 필요하다. 인공지능을 현명한 도구로 만들고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 못지 않게,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가치를 깨닫고 인간성 함양을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결과 중심의 평가에서 벗어나 판단 과정과 책임을 강조하는 평가 방식, 인공지능 활용과 윤리적 성찰을 함께 요구하는 수업,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섬기는 경험을 포함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전공별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논의와 새로운 시도들도 중요하지만, 교육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도 함께 논의 되어야겠다.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기능이 대체되는 상실의 시대에,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우리 인간만의 것들이 있다면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겠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한동이 다른 어느 곳보다 이웃 사랑하기를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최고의 곳이기를 바란다.   
(한동대학교 신문사 칼럼 투고, 2026년5월)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즐거운 일이로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 전도서 11장 7절...

오늘처럼 눈부신 봄날에는 한번씩 왠지모를 서글픔이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그닥 서글플 것 없는 지금을 생각해보면, 
지난 삶의 서글픈 순간들에대한 느낌들이 그렇게 올라오나 보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삶의 어두웠던 모든 기억들에도 불구하고,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니...
그 빛이 어두웠던 시간들을 비춰주시길... 남은 느낌의 그림자까지도 환희 밝혀주시길... 

그리고, 지난 어두웠던 시간들의 기억이 아니라, 아름다운 빛을 보며 살아가기를...
실로 아름답고 즐거운 것을 기대하며...

나는 원래 질그릇...

어제 너무 귀한 교수님 내외와 식사를 같이 했다.  

이분들의 삶이 너무 귀해서 존경심이 절로 느껴지는 분들인데, 

와이프와 집에 돌아와서 둘이서 나눈 이야기가,

이분들이 우리 부부와 같이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한다는 것이 

우리 부부에게는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분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 너무 귀한 은혜고 복이다...)


오늘 아침 주일 예배를 가는 길에, 

내 속사람이 너무 볼품없다는 생각을 하며 아쉬운 마음이 한가득이였는데...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실 만한 부분들이 있다는 설교 말씀을 듣고

나름 위로가 되던 중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라는 구절이 생각나서 

그래... 나는 원래 질그릇이였는데 싶었다...

내 모습을 아쉬워한다는게 우습기도 하고, 그런 나의 믿음없음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래, 나는 원래 질그릇이였는데...

여기저기 기스나고 부서진 질그릇이였는데...

그래도 쓰시겠다면 감사한 일이지... 


PS) 나와 달리 와이프는 훌륭한 점이 많은데...  순수하고 아이같음이 예수께서 칭찬하실 게다... 

함께 있는 것이 감사하고 내게 축복이라...  :) 

"성공 스토리"는 야바위...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전도서 9장 11,12절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비법(?)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과연 그렇게 똑같이 하면 성공하나?" 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그 사람처럼 산 사람이 그 사람만은 아닐텐데... 

그럼 그렇게 산 다른 사람들은 왜 "성공" 하지 못했는지 궁금했다... 


지난 주일 본문 말씀이, 힘있고 지혜있다고 전쟁을 이기거나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소위 말하는 성공도, 재물이나 권력도,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 사실... 

물고기가 열심히 살아가다가 어느날 문득 낚시바늘에 걸리듯이 

성공이라는 건 그저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이유없이 "틱" 주어지는 그런 것... 

그런 것이겠다. 그래, 과연 그런 것이겠다...


그러니 그 성공이라는 것도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닌 만큼, 부질 없는 것이고, 

성공을 목표로 살아가는 삶도, 결국엔 방향없이 걷는 자의 헛발질과 같을 뿐... 

그런 인생이  허무할 뿐이라는 솔로몬의 고백은 지혜롭다...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은 성공과 같은 야바위를 향한 것이 아니겠지요... 

소위 "성공" 이라는 것보다는 더 풍성한 삶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도 주신 삶을 감사한 마음으로 성실히 살아가기를 기도하며... 


행복... 계산

 "Ask yourself whether you are happy, and you cease to be so." - John Stuart Mill

(행복한지 물어보면 행복하지 않게 된다. 행복은 사라져 버린다. )


"기쁨을 분석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기쁨은 사라진다" - C. S. 루이스


왜 행복한지 분석하려고 보면 행복은 사라져 버리는 건데, 

분석할 수 없다는 말은, 계산으로는 행복을 만들 수 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말은 행복과 기쁨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일 수 밖에... 


삶에 허락하신 기쁨의 순간들을 온전히 누리며 감사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