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 인간다움을 생각하며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내게, 2016년 알파고의 등장이 충격이었다면, 2022년 ChatGPT의 출현은 세상이 그 이전과 이후로 명확히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ChatGPT이후 인공지능의 기능적 한계는 사실상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상상 가능한 모든 것은 실현 가능하고, 그 실현시기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울 것 같다. 데미스 하사비스나 일론 머스크, 샘 올트만 등의 인공지능 분야의 전문가들이 AGI 시대가 5년 내에 온다고 이야기 하는 것도 충분히 설득력 있다. 이렇듯, 인공지능의 수준은 짧은 기간 폭발적으로 향상되고 있고,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인간 삶의 여러 곳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데, 교육현장에서도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꽤나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혼란의 핵심은,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인공지능을 바라보며 ‘우리는 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일 텐데, 이는 인간을 지나치게 기능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1950년대 컴퓨터과학의 출현과 인지혁명 이후,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지각하고, 정보를 처리하여 지식을 구성하는가에 집중하면서, 인간의 정체성을 정보 처리와 문제 해결 능력이라는 기능적 측면에서 강조해 왔다. 인공지능의 연구개발도 이러한 기능을 모방하고 확장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는데, 인공지능이 여러 분야에서 인간의 인지 능력을 압도하는 지금, 이러한 기능적 관점의 접근은 인간의 고유성을 설명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능을 중심으로 인간과 기계를 비교하며, 아직 인공지능이 인간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기능이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손바닥 위에서 녹아가는 얼음을 보며 아직 얼음이 남아있다고 안도하는 것과 같다. 인공지능과 기능적으로 경쟁하려는 시도는 결국 우리를 열등감과 무가치함의 위기로 내몰게 된다. 발전하는 인공지능은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을 기능적 측면에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하도록 전환을 요구한다.

이처럼 기능의 우위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해지는 지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기능’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인간을 이해하려면 기능이 아닌 ‘우리의 존재 가치’를 묻고 답해야 한다. 도구가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양식을 바꾸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적 존재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존 셜이 ‘중국어 방’ 역설에서 이야기 했듯이, 인공지능은 고도화된 계산을 수행할 뿐 (혹은 시뮬레이션 할 뿐), 고통을 느끼거나 책임을 지며 사랑을 갈구하고 실천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여러 비판이 있어왔고 최근 인공지능을 도덕적 행위자로 보는 논의들도 있지만, 인간이 기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기능에서 존재가치로의 전환은 우리에게 기능의 고도화를 넘어 새로운 차원의 역량을 요구한다. 일차적으로는 윤리적 판단력과 책임감이다. 기술이 어떻게(How) 작동하는지를 넘어, 무슨 기술(What)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왜(Why) 필요하며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은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인 인간만의 몫이다. 윤리를 넘어 더욱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웃 사랑하기’를 향한 실존적 지향이겠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인공지능은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사랑이나 희생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의 마음처럼, 효율의 논리를 거스르는 가치를 선택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인간의 존엄성은 스스로 증명된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는 말씀은 로봇이 아닌 우리에게 유효하다.

새로운 시대에 인간됨을 정의하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교육현장에서도 적절한 변화가 필요하다. 인공지능을 현명한 도구로 만들고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 못지 않게,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가치를 깨닫고 인간성 함양을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결과 중심의 평가에서 벗어나 판단 과정과 책임을 강조하는 평가 방식, 인공지능 활용과 윤리적 성찰을 함께 요구하는 수업,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섬기는 경험을 포함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전공별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논의와 새로운 시도들도 중요하지만, 교육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도 함께 논의 되어야겠다.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기능이 대체되는 상실의 시대에,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우리 인간만의 것들이 있다면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겠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한동이 다른 어느 곳보다 이웃 사랑하기를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최고의 곳이기를 바란다.
- (한동대학교 신문사 칼럼 투고, 2026년5월)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즐거운 일이로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 전도서 11장 7절...

오늘처럼 눈부신 봄날에는 한번씩 왠지모를 서글픔이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그닥 서글플 것 없는 지금을 생각해보면, 
지난 삶의 서글픈 순간들에대한 느낌들이 그렇게 올라오나 보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삶의 어두웠던 모든 기억들에도 불구하고,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니...
그 빛이 어두웠던 시간들을 비춰주시길... 남은 느낌의 그림자까지도 환희 밝혀주시길... 

그리고, 지난 어두웠던 시간들의 기억이 아니라, 아름다운 빛을 보며 살아가기를...
실로 아름답고 즐거운 것을 기대하며...

나는 원래 질그릇...

어제 너무 귀한 교수님 내외와 식사를 같이 했다. 
이분들의 삶이 너무 귀해서 존경심이 절로 느껴지는 분들인데,
와이프와 집에 돌아와서 둘이서 나눈 이야기가,
이분들이 우리 부부와 같이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한다는 것이
우리 부부에게는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분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 너무 귀한 은혜고 복이다...)

오늘 아침 주일 예배를 가는 길에,
내 속사람이 너무 볼품없다는 생각을 하며 아쉬운 마음이 한가득이였는데...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실 만한 부분들이 있다는 설교 말씀을 듣고
나름 위로가 되던 중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라는 구절이 생각나서
그래... 나는 원래 질그릇이였는데 싶었다...
내 모습을 아쉬워한다는게 우습기도 하고, 그런 나의 믿음없음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래, 나는 원래 질그릇이였는데...
여기저기 기스나고 부서진 질그릇이였는데...
그래도 쓰시겠다면 감사한 일이지... 


PS) 나와 달리 와이프는 훌륭한 점이 많은데...  순수하고 아이같음이 예수께서 칭찬하실 게다...
함께 있는 것이 감사하고 내게 축복이라...  :) 

"성공 스토리"는 야바위...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전도서 9장 11,12절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비법(?)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과연 그렇게 똑같이 하면 성공하나?" 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그 사람처럼 산 사람이 그 사람만은 아닐텐데... 

그럼 그렇게 산 다른 사람들은 왜 "성공" 하지 못했는지 궁금했다... 


지난 주일 본문 말씀이, 힘있고 지혜있다고 전쟁을 이기거나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소위 말하는 성공도, 재물이나 권력도,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 사실... 

물고기가 열심히 살아가다가 어느날 문득 낚시바늘에 걸리듯이 

성공이라는 건 그저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이유없이 "틱" 주어지는 그런 것... 

그런 것이겠다. 그래, 과연 그런 것이겠다...


그러니 그 성공이라는 것도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닌 만큼, 부질 없는 것이고, 

성공을 목표로 살아가는 삶도, 결국엔 방향없이 걷는 자의 헛발질과 같을 뿐... 

그런 인생이  허무할 뿐이라는 솔로몬의 고백은 지혜롭다...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은 성공과 같은 야바위를 향한 것이 아니겠지요... 

소위 "성공" 이라는 것보다는 더 풍성한 삶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도 주신 삶을 감사한 마음으로 성실히 살아가기를 기도하며... 


행복... 계산

 "Ask yourself whether you are happy, and you cease to be so." - John Stuart Mill

(행복한지 물어보면 행복하지 않게 된다. 행복은 사라져 버린다. )


"기쁨을 분석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기쁨은 사라진다" - C. S. 루이스


왜 행복한지 분석하려고 보면 행복은 사라져 버리는 건데, 

분석할 수 없다는 말은, 계산으로는 행복을 만들 수 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말은 행복과 기쁨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일 수 밖에... 


삶에 허락하신 기쁨의 순간들을 온전히 누리며 감사할 수 있기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편 1~3절.)


최근에 자주 생각하는 구절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는 말씀... 

늘 그 자리에 서 있어서 풍경이 지루할 수도 있을텐데...  

반복되는 계절이 새롭지 않아 하루하루가 지루할 수도 있을텐데...


다른 곳이 아니라 늘 있어야 하는 시냇가 자리를 지키는 삶... 

계절에 맞춰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예측가능한 삶.... 

대단한 이벤트도 없고 남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쉬운 그런 삶이 

복있는 자가 누리는 은혜고 기쁨이라는 말씀이

보잘 것 없는 인생에게 적잖은 위로가 됩니다.

또한편으로는, 과연 있어야 할 자리에서 때맞춰 해야할 것들을 잘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어 부끄럽게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이 노래가 무엇이 특별해서 시편의 1장이 된건지 궁금했는데... 

복을 바라는 마음에 좋은 나침반인 것 같아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내게 주신 삶이 복됨을 알고, 

그 삶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은혜고 기쁨이 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지중에 원수가 된 사람들...

 여호수아 10장 15절~28절.


여리고성을 가볍게 넘었고, 아이성에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교훈을 얻었고, 

기브온에 속아 동맹을 맺고 그들을 종으로 삼으면서 이제 가나안 정복전쟁은 본격화 됩니다. 

주변의 다섯 왕들이 연합하여 기브온을 공격하고 구조 요청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 참전합니다. 

이스라엘과 가나안 다섯왕과의 전설적인 전쟁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리고, 해와 달도 여호수아의 간절한 기도와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으로 인해 멈추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전무후무한 기적같은 일들로 전쟁은 일방적으로 끝나갑니다. 

오늘 본문은 이 전쟁의 마무리 장면입니다. 


본문을 읽으며 눈에 띄는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enemy (원수) 

이스라엘이 이 원수들을 추격하고(chasing the enemy), 

이 원수들을 완전박살냅니다(completely crushed the enemy).

그리고 이 원수들의 왕들을 뾰족한 나무에 꽂아서 해가 질때까지 달아놓고 

그 마을에서는 한명도 살려두지 않고, 완전히 진멸합니다 (killed everyone in it, no survivors).


이 다섯 성읍이 어쩌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까...

멀리서 가나안을 정복하려고 다가오는 이민족(이스라엘)의 침략을 보면서 

그들의 처자식을 보호하기위해 주변 성읍과 동맹을 맺고 지켜보려고 했던 걸텐데...

어쩌다 원수가 되어 처절하게 진멸되었을까...

그들은 몰랐을겁니다. 그들이 왜 원수가 되었고, 왜 가나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는지...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고,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라...

그분과는 누구도 다툴 수 없고, 그분 앞에 어떠한 것도 설 수 없는 것을 고백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라면 '왜요'라고 반문 할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겠다" 하시면 유하시는 거겠지요... 

주가 가나안을 써야겠다고 하셨으니, 그걸로 이야기는 끝난 겁니다. 

비키지 않고 다퉈보자는 자들은 그분의 원수가 되고, 완전한 진멸의 대상이 되겠지요...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을 가로막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은, 순종이 아니면 그분의 원수가 되고 진멸되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하루의 삶도 그분과 함께할 수 있기를... 

그렇게 순종하는 자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